새벽 4시 반 경에 에어컨과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정확히 32시간 만에 전기가 들어왔다. 할렐루야!! 하지만 냉장고의 음식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큰 아이스박스 두 개와 얼음 여섯 봉지를 낑낑대며 옮기느라 생긴 내 근육통을 물리기엔 이미 늦었어...
그저께 밤에는 거짓말 안하고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살다살다 그렇게 엄청난 폭우는 처음. 형광등이 깜박거리길래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설마설마 하다 컴퓨터가 팍 나갔을 때의 그 충격이란... 딴 것 보다도 집에 나 혼자 뿐인데다 손전등도 양초도 없고 대체 나더러 뭘 하고 있으란 거지 싶어서 좀 서러웠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북 라이트라도 사둘걸. 양초를 사야지 생각했으면서도 왜 안 샀을까. 그나마 다행이었던건 빨래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전기가 나가줬다는 것. ...내가 조금만 덜 게을렀으면... 으아악 생각만해도 끔찍해.
창문을 내다봐도 앞이 보이질 않아 대체 얼마나 오는 거야 싶어 현관문을 열었다가 0.2초만에 쫄딱 젖었다. ...지붕 왜 있는 거임? 으악 심심해심심해를 외치며 핸드폰을 들었지만 전화할 사람이라곤 한 사람 뿐인데 걔는 또 전화를 안 받고 해서 결국 라디오 듣다가 잤다. 새로 산 전자사전에 숨은 기능
(사실 숨겨진 건 아니었지만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을 찾아보는 나름 의미있는 밤이었...지만 사정없이 내리치는 번개에 잠을 설쳤다.
일어나보면 전기가 들어와 있겠지!-싶어서 눈을 떴는데 밖에선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만. ...아 그래 여긴 한국이 아니구나... 자가발전기 같은 건 없는 거냐!! 지난 번에 SAFEWAY 정전 됐을 땐 2분도 안되서 전기 다시 들어왔잖아!! 가게엔 자가발전기가 있고 아파트엔 없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 아파트 관리인 말로는 이 아파트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며 저녁 때는 전기가 들어 올거라고 했다. 그 때까지 냉장고 음식들이 무사하길 비는 수 밖에 없다고.
아파트 나무 한 그루는 완전히 꺾였다. 지붕 있는 주차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순간. 잘 보면 바닥이 말라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막의 무시무시함이다. 그렇게 미친듯이 퍼부었는데 해가 뜨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왠지 좀 억울하다.
집 앞에 있는 River Rd.와 Campbell 사거리의 신호등도 나가서 저녁 때까지 복구되지 않았다. 더 재수없는 건 그 많은 신호등 중에 몇 번이고 불가항력으로 지나다닐 수 밖에 없는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의 이 사거리 신호등만 나갔다는 거...
집에 들어오는데 아침에 만난 관리인 왈, '내일까지 전기가 안 들어온대니까 오늘은 친구네 집에 가 있는 게 좋을걸.' ...지금 나 친구없는 거 알고 하는 말인가요. 그나마 유일하게 있는 친구는 샌디에고에서 투산으로 돌아오는 중. 만 하루동안 에어컨의 은혜를 입지 못한 집 안은 찜통이고 냉장고에 든 음식들은 물러져 가고... 여기저기 SOS 콜을 날리다가 결국 멀리 떨어져 있는 사제관으로 아이스박스를 빌리러 갔다. 신부님 감사...
아아 얄미운 하늘! 예뻐서 더 얄미워!! 왜 리사이징 말고 보정할 것도 없는 거지 이글이글...
저녁도 못 먹고 양초 사고, 아이스박스 빌리고, 얼음 사고, 얼음 부족해서 또 사러 가고 하다보니 9시가 넘었다. 집에 와보니 집 주변의 건물들과 옆 동 아파트, 주차장에 불이 들어와 있다. ...우리 아파트만 빼고. 이건 또 뭔 시추에이션이냐! 지금 차별하는 거냐?! 같은 아파트잖아 으흐흑... 여튼 그렇게 더운 밤을 보냈습니다...
어째 매년 액땜하는 것 같다. 아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지난 날의 고통들...
오늘 밤엔 다리미 빌려다가 카펫에 떨어진 촛농을 떼어 내야지. ...제발 떨어져라.
+여담이지만 미국 양초 뭐 이렇게 비싼가요. 반 토막만한 게 6불이야..............
++릴레이가 사정없이 늦어지고 있어서 면목이 없음. ...그런데 앞으로 더 자꾸 늦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