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2월 07일
연산군 이야기.
전에 죽을 각오로 간언했던 환관 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잔인한 처사에 관해 살짝 얘기한적이 있었는데, '환관과 궁녀'의 궁녀편쪽을 보니 과연 이 인간 제대로 미쳤구나 싶다.
밑으로는 본문 내용과 단상.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6월 19일에 두 명의 궁녀를 죽였는데, 그 방법이 매우 잔인했다. 이들의 사지를 찢고 머리를 잘라내라 한 후 잘라낸 머리는 문 위에 매달고, 찢은 사지는 전시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다시 그들의 손과 발을 하나씩 묻어두고 나머지는 계속 전시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잘라낸 그들의 머리를 가져와 궁녀들로 하여금 강제로 돌려 보도록 했다.
이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한 두 궁녀는 최전향崔田香과 수근비水斤非라는 여자들이었다. 연산군은 이들을 죽인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들의 사지를 잘라내 전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각각 다른 곳에 묻었으며, 묻은 자리에는 죄명을 적은 돌을 세우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들 두 궁녀는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연산군은 이토록 지독한 보복을 했을까?
전향과 수근비는 원래 연산군이 총애하던 여자들이었다. 전향은 출신이 분명치 않은 후궁이었고, 수근비는 사비私婢 출신 궁녀이자 애첩이었다. 전향이 언제 후궁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근비는 이 사건이 있던 해인 1504년 3월 7일에 궁녀가 된 여자였다. 그녀는 원래 개인의 노비였으나 연산군이 장례원에 전교하여 수근비를 대궐로 들이고, 대신 관비 옥금을 사비로 내주면서 입궁하여 궁녀가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대권레 엄천난 수의 여자들을 끌어들여 가무음곡을 즐겼다. 눈에 띄는 여자가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취하여 애첩으로 삼았다. 전향과 수근비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후궁이 된 여자들이었다.
중략
연산군이 한때 총애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그들을 유배시킨 배후에는 장녹수張綠水라는 여자가 있었다. 장녹수 역시 천비 출신 후궁이었는데, 그녀가 연산군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전향과 수근비가 질투심을 드러냈고, 그것이 연산군에게 발각되어 폐출된 것이다.
연산군이 당시 그토록 아꼈던 장녹수는 원래 집안이 몹시 곤궁하여 몸을 팔아 생활하던 여자였다. 그런 탓에 여러 남자와 살았다. 그러던 중에 제안대군(예종의 아들)의 가노家奴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고, 그런 상황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창기娼妓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와 춤 실력은 매우 탁월했다. 특히 노래를 아주 잘하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고 고운 목소리를 낼 정도였다. 거기다 나이에 비해 매우 앳된 얼굴이었다. 30살이 됐는데도 얼굴은 16살 처녀처럼 고왔다. 비록 인물은 그다지 출중하지 않으나 노래와 춤에 능하고 얼굴이 매우 어리게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연산군이 그녀를 불렀다.
연산군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즉시 궁으로 들여 애첩으로 삼았다. 이후 그녀는 숙원의 첩지를 받았고, 계속 벼슬이 올라 숙용에 이르렀다.
그녀는 일반 후궁들처럼 연산군을 대하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연산군은 그녀의 그런 면에 매료되었다. 실록에서는 연산군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대해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에게 하듯 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연산군은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녹수만 보면 기뻐하였다'고 했다. 실록은 또 장녹수에 대해서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쓰고 있다. 어쨌든 연산군은 장녹수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줬고, 장녹수와 함께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즐거워했다.
이렇게 되자, 다른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가 여간 아니었다. 전향과 수근비는 바로 장녹수를 시기하다가 본보기로 걸린 격이었다.
연산군의 눈 밖에 난 전향과 수근비는 재산을 모두 뺏기고 유배지로 떠났다. 하지만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유배지로 떠난 뒤인 그해 6월 8일, 연산군은 소격서의 종 도화를 비롯하여 전향과 수근비의 일족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간밤에 도성의 어느 담벼락에 익명서가 나붙었는데, 그 내용이 연산군을 비하하고 장녹수를 저주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이것을 전향과 수근비 일족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잡아들인 것이다.
그들을 국문한 사람은 추관으로 섬임된 유순과 의금부 당상관들이었다. 하지만 심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궁궐의 내부의 비밀스러운 일이라 하여 사관조차 국문장에 가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익명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못했다.
두 여자의 일족들을 모두 국문했지만 아무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잡아들인 사람이 무려 60여 명이었지만 아무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들의 이웃집 사람 40여 인을 더 잡아들이라고 했다.
심한 고문을 가하며 두 여자의 족친과 이웃들을 다그쳤지만 역시 익명서를 붙였다고 자복하는 사람을 없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전향과 수근비의 부모와 형제에게는 장 100대를 치게 하고, 사촌들에게는 80대를 치게 했다. 이어 전향과 수근비의 사지를 찢고 머리를 뽑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게 했다. 또 전향과 수근비의 머리를 궁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보도록 했고, 이후 그녀들의 머리는 외딴 섬에 묻었다. 또 그곳에는 그들의 죄명을 돌에 새겨 세우도록 했다.
설마 정말로 '시기와 질투를 했다'라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잔인하게 처형했을리는 없고... 그 익명서의 내용이 그만큼 빡돌만한 내용이었던가... 그나저나 애꿋은 이웃집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딸, 누나, 친지 하나 잘못둬서 장 맞은 가족 친지들도 불쌍하고... 하긴 처선때에도 그렇게 끔찍하게 굴었으니 이정도는 약과이려나.
연극 '이'나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해봐도 재미가 쏠쏠.
하긴 수많은 연산군의 후궁들에게서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으며 왕을 쥐락 펴락 한 여편네였으니 공길이 얼마나 증오스러웠을꼬. 밥에 독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아니, 그렇게 되면 극이 진행이 되질 않지). 앞뒤 정황을 보니 연극과 영화에서처럼 장녹수가 익명서를 조작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 같고, 아무래도 연산군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깔렸을테니 뭐 그 중 누군가가 썼겠지 싶다. 그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그러모아 훌륭히 각색한 작가의 창작 능력이 감탄스러울 뿐.
근데 내용을 보니 정말 녹수가 연산군에게 이놈 저놈 미친놈 했겠구나... 이 여자도 어딘가 나사 하나 나간 인간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안 그렇다면 제 아무리 지가 성질이 드세다 해도 어떻게 사람 예사로 죽이는 폭군에게 욕을 해댈 수가 있겠나. 어째 연산군에게는 동성애적 성향 뿐만이 아니라 마조히즘 성향 의혹도 있을 듯 하다. 뭐 간단히 뭉뚱그려 말하자면 그저 제대로 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역대 한반도의 왕들을 통틀어 어미가 죽임을 당한 왕, 선왕의 존재에 엄청나게 압박 받은 왕은 수두룩 함에도 이렇게 막나가는 왕은 연산군 밖에 없지 않나.
이 시대에 살았다면 양반이든 중인이든 양민이든 천민이든 숨쉬는 것도 두려워 벌벌 떨었겠지만 이렇게 폭군의 과거를 들춰내며 흥미로워 할 수 있으니 참 세상 좋아졌구나 싶다.(왠 할머니 모드)
다음에구입할읽을 책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으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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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으로는 본문 내용과 단상.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6월 19일에 두 명의 궁녀를 죽였는데, 그 방법이 매우 잔인했다. 이들의 사지를 찢고 머리를 잘라내라 한 후 잘라낸 머리는 문 위에 매달고, 찢은 사지는 전시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다시 그들의 손과 발을 하나씩 묻어두고 나머지는 계속 전시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잘라낸 그들의 머리를 가져와 궁녀들로 하여금 강제로 돌려 보도록 했다.
이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한 두 궁녀는 최전향崔田香과 수근비水斤非라는 여자들이었다. 연산군은 이들을 죽인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들의 사지를 잘라내 전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각각 다른 곳에 묻었으며, 묻은 자리에는 죄명을 적은 돌을 세우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들 두 궁녀는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연산군은 이토록 지독한 보복을 했을까?
전향과 수근비는 원래 연산군이 총애하던 여자들이었다. 전향은 출신이 분명치 않은 후궁이었고, 수근비는 사비私婢 출신 궁녀이자 애첩이었다. 전향이 언제 후궁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근비는 이 사건이 있던 해인 1504년 3월 7일에 궁녀가 된 여자였다. 그녀는 원래 개인의 노비였으나 연산군이 장례원에 전교하여 수근비를 대궐로 들이고, 대신 관비 옥금을 사비로 내주면서 입궁하여 궁녀가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대권레 엄천난 수의 여자들을 끌어들여 가무음곡을 즐겼다. 눈에 띄는 여자가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취하여 애첩으로 삼았다. 전향과 수근비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후궁이 된 여자들이었다.
연산군이 한때 총애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그들을 유배시킨 배후에는 장녹수張綠水라는 여자가 있었다. 장녹수 역시 천비 출신 후궁이었는데, 그녀가 연산군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전향과 수근비가 질투심을 드러냈고, 그것이 연산군에게 발각되어 폐출된 것이다.
연산군이 당시 그토록 아꼈던 장녹수는 원래 집안이 몹시 곤궁하여 몸을 팔아 생활하던 여자였다. 그런 탓에 여러 남자와 살았다. 그러던 중에 제안대군(예종의 아들)의 가노家奴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고, 그런 상황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창기娼妓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와 춤 실력은 매우 탁월했다. 특히 노래를 아주 잘하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고 고운 목소리를 낼 정도였다. 거기다 나이에 비해 매우 앳된 얼굴이었다. 30살이 됐는데도 얼굴은 16살 처녀처럼 고왔다. 비록 인물은 그다지 출중하지 않으나 노래와 춤에 능하고 얼굴이 매우 어리게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연산군이 그녀를 불렀다.
연산군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즉시 궁으로 들여 애첩으로 삼았다. 이후 그녀는 숙원의 첩지를 받았고, 계속 벼슬이 올라 숙용에 이르렀다.
그녀는 일반 후궁들처럼 연산군을 대하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연산군은 그녀의 그런 면에 매료되었다. 실록에서는 연산군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대해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에게 하듯 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연산군은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녹수만 보면 기뻐하였다'고 했다. 실록은 또 장녹수에 대해서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쓰고 있다. 어쨌든 연산군은 장녹수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줬고, 장녹수와 함께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즐거워했다.
이렇게 되자, 다른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가 여간 아니었다. 전향과 수근비는 바로 장녹수를 시기하다가 본보기로 걸린 격이었다.
연산군의 눈 밖에 난 전향과 수근비는 재산을 모두 뺏기고 유배지로 떠났다. 하지만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유배지로 떠난 뒤인 그해 6월 8일, 연산군은 소격서의 종 도화를 비롯하여 전향과 수근비의 일족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간밤에 도성의 어느 담벼락에 익명서가 나붙었는데, 그 내용이 연산군을 비하하고 장녹수를 저주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이것을 전향과 수근비 일족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잡아들인 것이다.
그들을 국문한 사람은 추관으로 섬임된 유순과 의금부 당상관들이었다. 하지만 심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궁궐의 내부의 비밀스러운 일이라 하여 사관조차 국문장에 가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익명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못했다.
두 여자의 일족들을 모두 국문했지만 아무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잡아들인 사람이 무려 60여 명이었지만 아무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들의 이웃집 사람 40여 인을 더 잡아들이라고 했다.
심한 고문을 가하며 두 여자의 족친과 이웃들을 다그쳤지만 역시 익명서를 붙였다고 자복하는 사람을 없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전향과 수근비의 부모와 형제에게는 장 100대를 치게 하고, 사촌들에게는 80대를 치게 했다. 이어 전향과 수근비의 사지를 찢고 머리를 뽑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게 했다. 또 전향과 수근비의 머리를 궁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보도록 했고, 이후 그녀들의 머리는 외딴 섬에 묻었다. 또 그곳에는 그들의 죄명을 돌에 새겨 세우도록 했다.
환관과 궁녀 中
설마 정말로 '시기와 질투를 했다'라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잔인하게 처형했을리는 없고... 그 익명서의 내용이 그만큼 빡돌만한 내용이었던가... 그나저나 애꿋은 이웃집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딸, 누나, 친지 하나 잘못둬서 장 맞은 가족 친지들도 불쌍하고... 하긴 처선때에도 그렇게 끔찍하게 굴었으니 이정도는 약과이려나.
연극 '이'나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해봐도 재미가 쏠쏠.
하긴 수많은 연산군의 후궁들에게서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으며 왕을 쥐락 펴락 한 여편네였으니 공길이 얼마나 증오스러웠을꼬. 밥에 독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아니, 그렇게 되면 극이 진행이 되질 않지). 앞뒤 정황을 보니 연극과 영화에서처럼 장녹수가 익명서를 조작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 같고, 아무래도 연산군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깔렸을테니 뭐 그 중 누군가가 썼겠지 싶다. 그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그러모아 훌륭히 각색한 작가의 창작 능력이 감탄스러울 뿐.
근데 내용을 보니 정말 녹수가 연산군에게 이놈 저놈 미친놈 했겠구나... 이 여자도 어딘가 나사 하나 나간 인간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안 그렇다면 제 아무리 지가 성질이 드세다 해도 어떻게 사람 예사로 죽이는 폭군에게 욕을 해댈 수가 있겠나. 어째 연산군에게는 동성애적 성향 뿐만이 아니라 마조히즘 성향 의혹도 있을 듯 하다. 뭐 간단히 뭉뚱그려 말하자면 그저 제대로 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역대 한반도의 왕들을 통틀어 어미가 죽임을 당한 왕, 선왕의 존재에 엄청나게 압박 받은 왕은 수두룩 함에도 이렇게 막나가는 왕은 연산군 밖에 없지 않나.
이 시대에 살았다면 양반이든 중인이든 양민이든 천민이든 숨쉬는 것도 두려워 벌벌 떨었겠지만 이렇게 폭군의 과거를 들춰내며 흥미로워 할 수 있으니 참 세상 좋아졌구나 싶다.(왠 할머니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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